1.


제제와 리와 셋이서 오랜만에 보기로 했었다. 제제가 휴학하고 나서 졸전을 핑계로(끝나지 않는 졸전 핑계ing) 그동안 통 보지 못했었다. 안 그래도 종강하고 보려고 했는데 리와도 이 이야기가 나와서 만나는 김에 셋이 보기로 했던 것이다. 제제와 리와 나는 올해 초 유럽여행 팟으로 작년 여름에는 여행 계획 짜느라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우리 그동안 못 본게 아쉽지 않냐면서. 그러고 보면 학기 중의 기억들은 흐릿흐릿 한데 여행의 기억은 유난히 선명해서 엊그제 다녀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제 벌써 1년이 다 되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1년이 다되가는 추억을 엊그제 다녀온 것 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어.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다른 동기인 석지도 함께 껴서 미니 동기 망년회 파티가 완성되었다. 


만나기 전에는 기분도 낼겸 만원 이하인 선물을 교환하는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선물 교환식도 넷이서 술을 먹자는 약속도 내가 제안한 거나 다름 없어서 다들 너가 웬일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생양 술 좀 늘었나보네~ 더 이상 알콜 쓰레기가 아니네~ 좀 놀 줄 아나보네~ 타고나길 집순이에 재미 없는 인간이라서. 그렇게 한 마디씩 하는게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버렸다. 


2.


내가 고른 선물은 더바디샵의 오렌지향(약간의 사심이 들어가있다. 최근 빠진 캐릭터에게 오렌지향이 나서. 친구들은 내가 오타쿠라는 걸 알지만 이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가지가지하는 오타쿠라는 것까지 알지만. 뭔가 민망하잖아 이런 말 하는거. 그치만 블로그엔 구구절절 쓸거야)미스트이다. 내가 제안 해놓고 막상 선물을 고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약속 시간 전에 부랴부랴 매장에 들려서 사왔다. 오는 길에 선물을 준비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약속시간까지 전날 가족들이 먹다 남긴 치킨 세조각 밖에 먹지 않았는데 막상 배가 고프진 않았다. 저녁 먹기는 조금 이른 5시가 약속 시간이라서 밥을 먹기 전에 보드게임을 하기로 했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진 사람이 한 판당 천원씩 돈도 걸었다. 워밍업으로 시작한 텀블링 몽키. 내 차례에 막대기를 빼고 우수수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두 판 연달아 져버렸다. 씨익씨익. 그 다음으로는 바퀴벌레 포커. 러브레터. 라스베가스를 차례로 했다. 중간에 또 머리쓰는 게임을 하긴 했는데 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재미 없어 하면서 버렸다. 러브레터도 재미가 없었어. 다른 3판은 제제가 연속으로 져버려서 사이 좋게 2천 3천원씩 내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제제 왈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순수한 인간이야. 뒤에서 하는 게임이 거짓말을 요하는 게임이라서 그런가. 바퀴벌레 포커가 내가 들고 있는 카드를 속여야만 하는건데 제제가 이거 바퀴 벌레야! 아니 바퀴벌레 아니야라고 말을 바꾸는게 너무 귀여웠다. 나와 제제 아슬아슬하게 종류당 3개씩 들고 있어 누가 질지 모르는 상황에 그래버려서 나의 승리가 되어버린. 제제야 덕분에 살았어. 


3.




마침 가고 싶었던 식당이 사라져있었다. 어쩐지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장사도 잘 되고 계절만 지났다고 하면 간판이 바뀌는 동네에서 나름대로 명맥을 유지해온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었던 식당이나 들어가서 밥 먹었다. 라멘집이었는데 여름엔 냉라멘을 먹어서 몰랐는데 평범한 라멘 메뉴는 좀 싱거운 느낌이라서 아쉬운 느낌.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고 마침 리가 우리가 만들었던 책들을 가져와서 뒷면만 보고 석지와 제제한테 4권씩 가져가라고 했다. 내 책은 제제가 가져갔다.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몸을 비틀었다. 이럴수가. 내 책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게 이토록이나 부끄럽다니. 꼭꼭 집에 가서 읽으라고 당부했다. 제제는 지금 쯤이면 읽었으려나? 


칵테일을 마시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2차을 마시러 갔다. 연말에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장사가 잘 안되는 곳인가 싶었는데 10시 11시쯤 되니까 꽉꽉 사람들로 찼던거 보면 역시 우리가 좀 이른 시간에 마신 모양이다. 칵테일 마시면서는 선물도 교환하고 선물은 위와 같다. 뭔가 주절주절 더 써보려고 했는데 이따 만큼 썼다고 벌써 귀찮다. 원래는 2차 마치고 심야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영화 라인업이 석연찮아서 영화는 나중에 보는 걸로 미뤘다. 제제는 바보 같이 자동차를 가져왔다고 원래는 심야영화 보고 나서 운전해서 갈 생각이었다고. 결국 차는 주차장에 놓고 몸만 갔다는 후문이. 


3차로는 막걸리를 마셨다. 평소 동명동만 가면 매일 같이 지나는 간판인데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간판만 보면 사실 가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부도 메뉴도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3도짜리 망고 막걸리 블루베리 막걸리랑 녹두 빈대떡을 촙촙 나눠먹었다. 배가 불렀다. 도수가 낮아서 오히려 이전에 마시고 온 칵테일의 취기가 풀리는 느낌이 들어버렸다. 나 요즘 술 늘었나? 헤어지는게 너무 아쉬워서 4차 가자고 졸랐다. 다른 친구들은 이 참에 다른 팀과 합석하라면서. 버리고 간다고 너무해. 이 멤버들과 신년회도 하기로 했다. 신년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놀아보기로~ 심야영화도 보고 방탈출에 VR도 즐겨보자고. 마침 석지가 방탈출 고수라고 하니까 벌써부터 설렌다. 


내년에 봐. 한 살 먹고 봐라고 인사하면서 헤어지는 길. 예나 지금이나 연말은 싫기 매한가지고 나이를 먹는 것도 싫은데 이런 인사로 헤어지니까 기분이 정말 이상하다. 이젠 정말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니까. 나에게 있어서 2019년은 어떤 한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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