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유령들
국내도서
저자 : 황여정
출판 : 문학동네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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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버지가 있다. 그는 장마가 끝나자 집의 모든 벽지를 뜯어낸 뒤 페인트칠을 했다. 벽지를 끝으로 집안의 모든 종이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어쩌면 종이를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책을, 그다음엔 글자가 있는 종이를, 결국엔 그저 종이일 뿐인 종이까지도 무서워하셨다. 서가의 책들을 모두 꺼내 석유에 불을 붙여 전부 태워버렸던 건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타오르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율의 장래나 진로와 같은 거시적인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다만 아버지가 율에게 ‘뭐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에 자연스레 어깨너머로 보았던 수선을 배워보고 싶다고 답했고 아버지가 율에게 유일하게 가르친 것은 수선 기술이 되었다. 정확히는 수선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 가닿은 사람의 마음 확인하는 방법이다. 율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닿으려야 닿지 않는,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거짓말이 아니다. 어떤 시절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죽는다."

이토록 말도 안 되는 문장으로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율의 부모와 징의 부모, 누군가의 부모이기 전에 청춘이었던 시절이다. 네 명의 청춘 남녀는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현실 속에서 실재와 허구 사이를 방황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들에게 ‘희곡’이란 불온한 시대를 잠시나마 도피할 수 있었던 탈출구였다. 그마저도 국가의 거대한 폭력 아래 검열당하고 즐겨 했던 농담들 마저 휩쓸려버리곤 했다. 그들이 그 시절 남긴 <알제리의 유령들>은 미궁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허구인지 모르는 그 희곡의 발자취를 자식 세대가 자연스레 따라간다. 

누군가가 이야기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내게 있어서 이 소설이 그러하게 읽어졌다. 허물 없이 제 집을 드나들며 자라 왔던 율과 징. 어린 징은 율에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율에게 있어서 징은 자신의 또 다른 세계였다. 그런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파문이 일어난다. 부모 세대의 사소했던 장난은 더 큰 불로 이어져 내려와 굳건했던 관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는 하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자신들이 관여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린 것이나 다름없지만 주어진 운명에 상처받고 관계의 전환점이 일어난다. 원치 않은 비극 앞에 놓인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모든 일을 덤덤하게 받아들일까? 아니면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벗어나고자 할까? 그 선택에 주목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야말로 몽롱했다. 닿으려야 닿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율이 배워나갔던 것처럼 쉽사리 읽기엔 어려운 책이었다. 얽혀있는 운명의 실마리 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헤쳐나간다. 

그렇게 소설은 그 운명의 실마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알제리의 소설>이라는 연극 대본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입장과 어떻게 그 비밀을 풀어나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된다. 4부로 나뉘어져 화자가 각기 다른데 각 사건이 독립적인 사건인 듯 보이지만 겹쳐지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겹쳐지지는 않는다. 1~3부는 그렇게 잡힐 듯 말 듯 희곡에 다다르다가 마지막 4부에서 그 모든 실마리가 풀린다. 마치 빈칸 채우기처럼 모든 빈칸들이 4부에서 채워지면서 모든 서사가 하나로 이어진다. 결국 중요한 건 허구 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진실을 알아내고 싶다는 마음까지도 진실이 될 수 있다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방황했던 4명의 남녀는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유령이 되어버린다고 해도 이름만은 남는다. 은조가 알제리의 유령의 극본에 글쓴이의 이름을 붙여준 것처럼 말이다. 은조와 현가, 율과 징. 어쩌면 그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 자체만으로 실재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어진 운명에 상처받아 잠시 떨어져 있었던 율과 징은 다시 만남을 기약하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주어진 운명을 덤덤하게 맞이하겠다는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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