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개미지옥
국내도서
저자 : 서유미
출판 : 문학수첩 20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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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단순히 내가 요즘 개미지옥에 빠진 것마냥 꼬리에 꼬리를 무는 덕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해서 제목에 눈길에 갔다. 흔히 왜 덕질을 개미지옥에 비유하기도 하니까. 순전히 제목만 보고 골랐는데, 내용도 괜찮았고 술술 읽혀져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의 첫부분에서 판타스틱한 백화점 파격세일이 벌어진다고 했을 때, 화자가 백화점 직원이니 누군가에게는 개미지옥이 펼쳐지는데...이런 느낌으로 흘러갈 줄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개미지옥은 이 소설의 주요 무대인 백화점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 거의 다 각양각색의 이유로 백화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개미지옥의 의미랑 어떤 의미에서는 일치하다고 할 수있다.

 

이 소설의 특징중 하나는 특정한 장소는 그대로 인채 화자만 계속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백화점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모음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원미동을 배경으로 한채 옴니버스식 이야기가 진행되는 원미동 사람들이 잠시 생각나기도 했다. 판타스틱 개미지옥도 똑같은 배경에 옴니버스식 구성이니 굳이 분류하자면 연작 소설이겠지만 원미동 사람들이랑은 비슷하면서도 다른점은 모든 이야기가 백화점이라는 장소 안에서 같은 시간 (파격세일 기간)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중간 중간 호텔이라던가 여관이라던지 다른 장소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원미동 사람들 같은 경우는 원미동이 배경이긴 하지만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이 '원미동'이라는 느낌이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백화점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하나씩 있다. 그리고 그런 백화점의 유혹(?)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백화점에서 손님이 주저 없이 물건을 고르는 것을 보다보니 비싸다는 감각이 사라지기도 하고, 명품샵에서 손님을 대하다 보니 자신도 명품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떤 물건이든 백화점 물건이 더 좋다는 생각 때문에 주구장창 백화점의 물건을 고집하기도하고 반대로 다른데서 정맞고 백화점에서 화풀이 하려고 온 손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백화점 물건이 비쌈에도 불구하고 카드 할부를 긁어서까지 그 물건을 쟁취하기도 한다. 이 구두만 있으면, 이 가방만 있으면, 이 옷만 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욕망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다. 이런 욕망은 나 같이 아주 가끔씩 백화점에 들르는 손님보다는 늘 물건과 가까이 있는 직원들에게 더 크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에 공감이 어렴풋이 갔다. 백화점이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면 그 자본주의에 허덕이는 20대들에 대해 서술된 부분에도... 어쨌거나 이 소설은 개미 지옥의 개미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있다.

 

아무튼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제일 궁금한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멘 스팽글이 달린 검정색 카디건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다. 그 검정색 카디건 때문에도 수 많은 골치 아픈 일들이 일어났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보는 사람마다 가지고 싶어서 안달인 건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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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어려운 가정 형편이나 복잡한 것을 친한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서로 걱정해주고 위로해 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었다. 그런 고백이 오히려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해 주는 역할까지 했다. 헤프게 아무에게나 떠벌리는 게 아니라 너니까, 너한테만 내 형편이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특별한 신뢰의 의미였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좀 달라졌다. 신입생 입학 안내나 스무 살을 위한 매뉴얼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친구들도 소영도 갑자기 있는 척하기 바빠졌다. 어른이 돼서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모두들 난 잘 지내,로 바뀌어 버렸다.

  물론 남의 구질구질한 사연 같은 거 들으면 우울하고 불편해진다. 말한다고 가난이나 나쁜 사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위로하는 척하면서 결국 멀어져 간다. 그래서 모두들 나야 잘 지내지, 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나 죽고 싶어, 진짜 힘들다, 차비도 없어, 라는 말이 있겠지만 그런 말은 목구멍 밑으로 꿀꺽 삼키면서 사는 것이다. 

  우는 소리 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간다는 건 보기 좋다. 하지만 뭐랄까. 가끔은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가면무도회를 벌이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가면을 쓴 채 춤을 추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고 좀 더 멋지고 화려한 가면을 쓴 사람이 승자가 된다. 원래 어떤 얼굴인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알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살해 버린 사람의 친구나 가족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내색을 안해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몰랐어요. 진작 말했더라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그럴까? 글쎄, 과연. p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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