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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존 버거(John Berger) / 최민역
출판 : 열화당 2012.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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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는 이미지, 누드화, 유화, 광고에 관한 보수적인 미술담론을 전복시킨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총 일곱가지의 목차 중 세개의 차례는 그림 도판으로 네 개의 차례에서는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어 두 방식으로 번갈아가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서, 남자들의 보호, 관리 아래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으로 살아남으려고 머리 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그녀의 자아는 찢겨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 때도 그녀가 걸어가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교육받고 설득당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는 한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이렇게 감시하는 부분과 감시당하는 부분이라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책에 서술된 모든 에세이가 흥미로웠지만 그 중에서도 누드화와 사회에서 요구되는 여성성과 연관지어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 피지배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서술한 것이 가장 인상 깊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시선으로 스스로의 이미지를 감시하고 검열하게 하는 건 미디어의 매체만 달라졌을 뿐 책이 쓰여진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니까. 작품 속에 담긴 남성의 시선과 젠더의 권력과 연결지어서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 책이 처음이라는 것에 놀랐고 감탄했다. 이를 오늘날 한국 매체에서 요구되어지는 여성의 이미지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순하고 아이같은 얼굴 연약한 여성을 찬양하고 그렇지 않은 여성을 비판하고 여성을 프레임화 시키는 것부터 최근의 이슈들까지. 여성 조차도 남성을 검열하는 것에 익숙하지지 않아하고 같은 여성을 더 많이 검열하는 것도 이에 비롯 된 것일 것이다. 끊임 없이 자신을 누군가의 시선에서 검열하고 살아올 수 밖에 없었으니까. 


벌거벗은 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드는, 벌거벗은 상태로 타인에게 보여진다 하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벌거벗은 몸(naked)이 누드(nude)가 되려면 특별한 대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특별한 대상으로 보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그 몸을 이용하도록 자극한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벌거벗음(nakeness)와 누드(nude)의 차이점은 섹슈얼리티와 연관지어서 설명했는데 항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창작자가 섹슈얼한 의도를 그려넣었거나 그려넣지 않았든 작품을 보는 감상자가 그 의도를 감지하니 결국에는 이를 구별하는 것은 주관적인게 아닌가하고.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은 종종 전시된 작품의 숫자에 압도당해, 그들 중 겨우 몇몇 작품만 주의를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한탄스러운 무능함에 놀라기도 한다.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의 회화 전통 속에서 탁월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을 구분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천재’라는 개념은 이에 대해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혼란과 미술관의 전시 벽면에 그대로 드러난다. 흔히 수많은 삼류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ㅡ 이에 대한 해명은 고사하고 ㅡ 무엇이 그 둘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여행을 통해 프랑스 3대 미술관이니 각종 유명 미술관에 다녀왔지만 한정된 시간안에 많은 작품들을 보다 보니까 머리 속에서 여러 작품들이 뒤엉켰다. 분명 여행 가기 전에는 여러 미술관들을 다니면서 느낀 게 많지 않을까하고 전공책에서만 보았던 작품들을 실제로 볼 생각에 두근거렸다. 그러나 다녀와서는 나만 엄청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다음에도 다시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여유롭게 가이드를 통해서 작품 하나하나 설명 들으면서 관람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저자가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어서 위안이 되었다. 확실히 수 많은 작품들이 즐비하는 미술관들 보다는 근대~현대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는 미술관들이 관람하기도 편했고 동선도 더 잘짜여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내가 관여할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만 미술관 입장에서는 그렇게 전시하는 것이 최선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관람객들이 더 효과적인 관람할 수 있는 전시방법이 있는건지 이것도 아니면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라고 결국에는 관람자의 태도에 달린건지... 잘 모르겠다. 


역자는 Way of Seeing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네이밍했는데 확실히 책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는 직역보다는 역자의 의역이 더 와닿는 것 같다. 새로운 방식으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사유하는 시간을 꾸준히 갖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어렵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어렵지 않게 서술했기 때문에 미술 비평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입문서로 추천해주고 싶다.


18.05.05~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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