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세기 전 고인이 된 그녀를 추모하며.
누군가의 일기를 본다는 것은 한편으론 죄책감을 동반한다. 중간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기 싫다는 언급이 있었던 것같은데 그럼에도 출간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다.
그냥 궁금했다.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이였는지.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박관념과도 같은 죽고싶지않다는 말은 죽음에 대한 예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가 나열한 죽음이란 글자가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건 무얼까.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던 적도 죽음에 대한 열망을 느낀 적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이고 죽음을 생각하기엔 난 이렇게 젊고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그런걸 생각할 만큼 삶을 살아보지 않았고, 내게 있어 그것은 의미없는 성찰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건조하다 못해 무심한 그녀의 문체는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미친듯이 삶에 대해 갈망하고 집착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려고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리고 생의 의지가 결국엔 '죽음'이란 단어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무색무취의 열정과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나는 의문이 일었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 사소한 충격이였다. 그저 지금에 안주하는 평온한 삶에대한 경멸. 난 이제껏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다. 한없이 우울한 잿빛과도 같은 책. 읽는 이들에겐 전혀 배려가 없는 이기적인 글들이지만 (출판된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므로) 한편으론 그녀 심연의 고독이 나에게 있어 위안을 주기도 했다. 다른이의 괴로움이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된다는게 슬프고도 우습구나.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괴로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유일한 빛이였던 정화를 남겨두고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글을 읽는 내내 그녀가 비범하다는 걸 느꼈지만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는 크게 와닿지가 않는다. 난 아직도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녀의 고독을 모르고... 그냥 모르겠다. 머릿 속 의문들이 뒤섞여 정리되지 않는다.
* 어렸을 때 내 소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역시 그것은 변함없는 것 같다. 무명으로 남을 용기가 나에게는 없다.
* 이 고독은 어떤 벗이나 육친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고 상호전달의 이해가 불가능한 단절의 상태임을 생각할 때 정말로 뼛속부터 외로웠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상태의 완화, 또는 감정의 예리함이 무디게 죽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맨 의식 밑에서 우리는 결코 있었던 일을 잊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