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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읽었다. 정확히는 앞부분을 읽고 뒷부분을 읽어야하는데 2주간 손이 가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진작 연체가 되었지만 그래도 책은 읽고 반납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다행히 다 읽고 반납하는구나!
이 책을 시작으로 시리즈를 모두 섭렵할 생각이다. 진짜 재밌게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저자가 말하는 오늘 날 디지털 사회의 폐해의 장본인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나랑 비교하며 읽으니까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서 부쩍 내가 주체적인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는 깨달았다. 스마트폰에도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까...?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으니 지금 당장 습관들을 싸그리 고칠 수는 없겠지만 차차 줄여나가야겠다. (난데 없는 다짐)
투명 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행복이란 단어는 빈틈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복은 중고지 독일에서는 gelucke(빈틈을 의미하는 lucke에 접두사 ge가 붙은 형태)였다.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 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저자가 정의한 투명사회는 그런 것이다.
항상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지도 않고 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 적정 거리라는게 지켜지기란 사실 어렵다. 지나치게 투명한 세상에서 우리는 알지 못해도 되는 정보까지 함께 알아가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나도 모른 사이에 내 자신의 일부분이 전시되어 진다.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연예 방송계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일상을 밀착 취재하는 리얼리티는 항상 인기를 끌고 그런 리얼리티 속에서 남들에게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꾸밈을 강요당한다. 그 사람의 가장 민낯을 알고 싶어하고 가십으로 소비한다. 누가 데뷔만 했다하면 그 사람이 인터넷에 남긴 기록 하나하나까지 폭로 당한다. 인스타 누구를 팔로우 했고 누구를 언팔로우했다라는 사실까지 화제되고 기사가 나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세상이다.
전시의 강제는 가시적인 것을 착취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표면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투명하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더 이상 이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반짝이는 표면은 해석학적 심층 구조를 지니지 않는다. 페이스 역시 그렇게 전시가치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투명해진 얼굴이다. 전시의 강제는 결국 우리에게서 얼굴을 빼앗아간다.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전시가치의 절대화는 가시성의 폭정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저자는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 추구하는 투명성은 가히 폭력적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투명성이란 표현의 자유일까? 또 다른 방식의 검열일까?
쓰다보니 앞 파트의 투명사회의 투명성에 대한 부분만 서술하게 됐지만 '무리 속에서' 파트도 흥미롭게 읽었다. 무엇보다 '무리 속에서'는 디지털 사회의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폐해에 대해 이야기 하다 보니까 더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근데 내가 확실히 책을 읽고 공감한다 그 이상으로는 내 느낀점을 쓰지 못한다는게 너무 슬프다. 어쩔 수 없군... 급 마무리하는 수 밖에... 아무래도 이 시리즈는 구입해서 두고두고 읽고 싶다.
+ 롤랑 바르트를 인용한 모든 글도 인상 깊었는데 그 중에서 이 말이 제일,,, 디지털 사진은 탄생도 죽음도 운명도 그 어떤 사건도 없이 투명하다는 말,,,
롤랑바르트에게서 사진은 시간의 부정성을 본질적 구성요소로 하는 생의 형식과 결부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진의 기술적 조건, 즉 아날로그적 성격 때문이다. 디지털 사진은 전혀 다른 생의 형식,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나는 생의 형식에 부합한다. 그것은 탄생도 죽음도 없는, 운명도 사건도 없는 투명한 사진이다. 운명은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사진은 의미론적, 시간적 응축을 아지 못한다. 그러한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